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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64. <태사공>송재공휘기환묘갈명(松齋公諱基煥墓碣銘)
1. 문헌 목록 〉24. 24世 〉2. <요재공>옥산공휘병석묘표(玉山公諱炳碩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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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재공>옥산거사휘병석가장(玉山居士諱炳碩家狀)
玉山居士諱炳碩家狀 公諱炳碩初諱熺七又熺豊字贊文號玉山維我趙氏玉川者皆以高麗侍中諱璋爲上祖三傳忠獻公諱元吉中世顯祖有四子曰樂齋諱瑛 曰虔谷諱瑜縣監諱瑾節制諱琰爲京鄉分派之祖其叔父 太師諱璵別爲一派公樂齋公之後也十五世祖玄洲諱彭孫施自淳昌移于南原辞庇安宰歸臥蓼溪之二梧亭諷詠雅懷詩有遺而終其三子陶庵諱纘亦辞谷城宰率季子叅奉諱由信復南移寓寶城當燕山甲子士禍因成宗廟朝臣祖父正言諱時平官歷憂禍依播遷故也孫清庵公之漢始生于城北杜門洞出宰海南有淸政至今傳頌碑歷佐郎諱瓘 贈兵判諱廷美嘉善諱弘國丙子倡義主簿諱言悌孝行諱弼周諱淳重諱泰德諱東輔寔公四世以上也曾祖諱鎭圭 贈資憲工判祖諱洞以文行鄉里化之世稱君子 贈嘉義漢城左尹 考諱民植號東邨性豪爽器量宏遠孝友勤儉自成一家丁外憂素昧地學而能自卜牛眼地師稱服甞道遇一孤兒諦視知其非凡預以幼妹爲約歸告母夫人夫人怒曰汝今一坊長自何忍以一妹乃爾敬吿曰此必先窮後達願勿深慮後果富榮孤兒卽朴參判南鉉先堂監役朴重龍也養親必服力爲快甞於釋奠大祭日姑作販市行預具巾服叅大禮目擊者私自謗語乃厲聲曰吾聞自路百里負米顔淵一瓢寠巷猷不失爲孔門高弟今爲親販市而叅於禮筵於禮傷乎否衆驚服歎曰趙某之世難爲鄉愿云磊落不羇常爲鄉黨頌袖 高宗己丑以孝友聞 贈加善户叅推恩兩世妣 封貞夫人金海金氏南湫公玄孫洛禧女也生公于 高宗甲子七月二十五日生性行端嚴孝謹克紹家業弟氏重庵公 炳斗姊兄竹山安圭逸公三人年將七旬刑影相隨極其湛樂鄕隣寞不欽慕與其外兄朴參判同庚而自幼共學於同塾及富榮兩度外先掃墳之行欲與俱載每辞以不可借人爲榮公弱年承家禍亂相尋惟以正道解紛至晩極念先葬爲憂故遠近地師門客無日不盈座頗不寂蓼癸酉二月二十一日以痰咳添崇臨命少無恒化色潛燕流涕鳴咽不肖進慰曰大人有何至痛在心乎曰吾平生爲先占墓未得永窆而逝是以爲恨余曰小子雖不敏大人百歲後十年壬午自鞍爲極念願勿遺恨曰否吾之父母吾且不能汝亦不有爾之父母乎言訖而終享年七十後十年壬午自鞍峙家族墓地緬奉于所居石村上墓後向艮原有牲石銘配珍原朴氏葦南公熙中后純眞女也先公五歲己未正月二十日生貞靜端雅不德兼備頗多内助癸酉十月十五日卒壽七十五墓合塋育四男二女男孟老南奎忠奎平奎女南平文敬鎬廣州李秉律妻孟老育三女適南陽宋甲洙慶州李有萬晋州姜大坤南奎育三男長啓夏入承伯父后次啓奉啓烈忠奎育一男一女啓龍濟州粱在甲妻平奎有三男二女啓昌啓賢啓允清州韓京洙水原白佑善妻曾玄不記鳴呼兩堂俱以七耋之年同年俱逝今三十有六年余以六男妹之季偃仰之問余亦七旬兄與姊次第以逝兩位壽宅或可安厝兩祖考妣永窆之計尚未商確回想先大人臨命遺囑之意罪思孺慕曷有其極言念及此寧欲無吪謹草如右之實以爲狀稿 戊申冬十月 日 不肖子 平奎 謹記 옥산거사휘병석가장(玉山居士諱炳碩家狀) 공(公)의 휘(諱)는 병석(炳碩)요. 처음 휘는 희칠(熺七) 또는 희풍(熺豊)이며 자는 찬문(贊文), 호는 옥산(玉山)이다. 우리 옥천조씨(玉川趙氏)는 모두 고려의 시중(侍中) 휘 장(璋)을 상조(上祖)로 하고, 三대를 내려와 충헌공(忠獻公) 휘 원길(元吉)은 중세(中世)의 현조(顯祖)로 네 분 아들을 두었는데 요재공(樂齋公)은 휘가 영(瑛)이요, 건곡공(虔谷公)은 휘가 유(瑜)이며, 현감공(縣監公)은 휘가 근(瑾)이요, 절제공(節制公)은 휘가 염(琰)인데 경향 각지에 분파(分派)된 선조가 되고 있으며, 그의 숙부 태사(太師) 휘 여(璵)와 별도의 파계를 이룬다. 요재공의 후손에 十五세조 현주공(玄洲公)은 휘가 팽손(彭孫)인데 순창에서 남원으로 이거하여 비안현감(庇安縣監)을 사직하고 돌아와 요천(蓼川)의 이오정(二梧亭)에 누워 소회를 읊조리다가 시(詩)가 남아 있다. 생을 마쳤다. 그의 셋째 아들 도암공(陶菴公) 휘 찬(纘) 역시 곡성현감(谷城縣監)을 사직하고 막내아들 참봉(參奉) 휘 유신(由信)을 거느리고 다시 남원에서 보성으로 이사하였는데, 연산조(燕山朝) 갑자사화(甲子士禍)때 할아버지 휘 시평(時平)께서 성조조(成宗朝)에 승정원 정언(承政院 正言)으로 계셨기 때문에 연산모(燕山母) 윤씨(尹氏)의 폐비(廢妃)와 관련하여 화(禍)가 미칠까 염려하여 옮겨 오신 것이다. 손자 청암공(清庵公) 지한(之漢)을 비로서 성(城) 북쪽 두문동(杜門洞)에서 나와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나아갔는데 청렴한 정사를 해 지금도 송덕비(頌德碑)가 전해온다. 좌랑(佐郎) 휘 관(瓘)은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고, 휘 정미(廷美)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이며, 휘 홍국(弘國)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주부(主簿) 휘 언제(言悌)는 효행(孝行)이 있었으며, 휘 필주(弼周), 휘 순중(淳重), 휘 태덕(泰德), 동보(東輔)는 공의 四세(세) 이상이다. 증조 휘 진규(鎭圭)는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조(祖) 휘 형(泂)은 문행(文行)으로 향리(鄉里)를 교화시켜 세상에서 군자(君子)라고 일컬었으며 가의대부(嘉義大夫)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민식(民植)은 호가 동촌(東村)인데 성품이 호탕하고 기량(氣量)이 컸으며 효우(孝友), 근검(勤儉)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아버지 상(喪)을 당해서는 평소 지리학(地理學)에 밝아서 스스로 우복지(牛服地)를 가려 지사(地師:풍수)가 감탄하였다. 일찍이 길에서 한 고아(孤兒)를 보고는 그 아이가 비범(非凡)한 것을 알아보고서 미리 누이와 혼인할 것을 약속하고 돌아와 모부인(母夫人)에게 고하니, 부인이 노하여 말씀하기를, “네가 오늘날 마을의 어른이 되었는데 어찌 차마 누이 하나를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시니 말씀드리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처음에는 곤궁하나 후에는 현달(顯達)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너무 깊이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는데 후에 과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으니, 그 고아가 바로 참판(參判) 박남현(朴南鉉)의 아버지인 감역(監役) 박중룡(朴重龍)이다. 어버이를 섬김에는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야 직성이 풀렸다. 일찍이 석전대제일(釋奠大祭日)에 우선 먼저 행상(行商)을 하면서 미리 건복(巾服)을 준비해 대례(大禮)에 참석했더니, 목격자가 비난하는 말을 수근거렸다. 그러자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듣건대 자로(子路)는 어버이를 위해 一백리 길에 쌀을 지고 왔으며, 안연(顔淵)은 표주박 하나로 가난한 동네에 살았지만 오히려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고제(高弟) 자리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내가 어버이를 위해 행상을 하다 석전례에 참석함이 예에 어긋나는가 아닌가?”하니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감탄하기를, “조모(趙某)가 있는 세상에서는 향원(鄉愿:한 고을에서 행세하는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성품이 호탕하여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항상 향리의 영수(領首)가 되었다. 고종(高宗) 을사년(乙巳年)에 효우(孝友)가 보고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户曹参判)을 증직하니 양세(兩世)가 추은(推恩)되었다. 비(妣) 정부인(貞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는 남추공(南湫公)의 현손(玄孫) 낙희(洛禧)의 따님인데 공을 고종(高宗) 갑자년(甲子年) 七月 二十五日에 낳았다. 나면서부터 성품과 행실이 단정하고 엄하고 효성스럽고 삼가서 가업(家業)을 이었으며, 아우 중암공(重庵公) 병두(炳斗), 자형(姉兄) 죽산(竹山) 안규일(安圭逸) 공과 세 사람의 나이가 곧 七순(旬)이 되게 되었는데 서로 그림자처럼 함께 상종하여 즐거움을 극진히 하니, 향리에서 모두 흠모하였다. 그의 외종형 박참판(朴參判)과는 동갑인데 어려서부터 함께 같은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어서는 두 차례나 외가(外家)집 선영을 위해 성묘(省墓)하는 걸음을 하였는데 매양 함께 타기를 권했으나 공은 매양 남의 영화(榮華)에 의지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공은 二十대에 집안의 계속되는 화란(禍亂)을 당했으나 오직 정도(正道)로 분란을 해결했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매우 선조의 장지(葬地)를 근심하였기 때문에 원근(遠近)의 지사(地師:풍수)와 문객(門客)들이 하루도 집에 가득하지 않은 날이 없어 아주 떠들썩하였다. 계유년(癸酉年) 二月 二十日 가래가 목에 끌어올라 곧 임종하게 되었으나 조금도 평소의 안색을 변하지 않고 슬피 눈물을 흘리시며 목이 메시었다. 불초가 앞으로 나아가 위로드리기를 “대인(大人)께서는 무슨 마음 아픈 일이 있으십니까?”하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평생 선조의 묘자리를 잡으려고 애썼으나 영원히 안장(安葬)할 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그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시었다. 내가 말씀드리기를, “소자(小子)가 비록 불민(不敏)하나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마음을 쓰고자 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였더니 말씀하시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 부모를 나도 하지 못하였는데, 너에게는 네 부모가 또 있지 않느냐?” 하시고는 말이 끝나자 운명하시니, 나이 七十세이셨다. 十年 후 임오년에 안치(鞍峙)에 있는 가족 묘지를 살고 있는 석존(石村) 위의 터 뒷쪽 간좌(艮坐) 언덕으로 면봉(緬奉:이장(移葬))하였는데 상석과 비명(碑銘)이 있다. 배(配)는 진원박씨(珍原朴氏) 위남공(葦南公) 희중(熙中)의 후예인 순진(純鎭)의 따님인데 공보다 五년 앞선 기미년 정월 二十日에 출생하였다. 정숙하고 단정하여 부덕(婦德)을 겸비하여 아주 내조(内助)함이 많았다. 계유년 十月 十五日 졸하시니, 수(壽)는 七十五세로 묘는 합영(合塋)이다. 四男二女를 길렀으니, 남은 맹로(孟老), 남규(南奎)는 三男을 길렀는데 장남 계하(啓夏)는 백부에게 출계(出系)하였다고 차남은 계봉(啓奉), 계열(啓烈)이다. 충규는 一男一女를 길렀는데 아들은 계룡(啓龍)이요. 딸은 제주(濟州) 양재갑(梁在甲)의 아내이다. 평규(平奎)는 三男二女를 두었는데 아들은 계창(啓昌), 계현(啓賢), 계윤(啓允)이며 딸은 청주(清州) 한경수(韓京洙), 수원(水原) 백우선(白佑善)의 아내이며, 증손, 현손은 기록하지 못한다. 아, 양친께서 칠순의 나이로 같은 해에 함께 돌아가신 지 지금 三十六年이 되었다. 내가 여섯 남매의 막내로 사는 동안 나 역시 七旬이 되고, 형님들과 누나들 역시 차례로 돌아가셨다. 두분의 묘는 혹 편안히 모셨다고는 하지만 조고비(祖考妣) 두분을 영원한 자리로 모실 계획은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아버님께서 임종 때 부탁하신 뜻을 회상하건대 죄송스런 생각과 사모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으랴? 이런 말은 언급하려니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삼가 위와 같이 사실을 기록해 장고(狀稿)를 삼는다. 무신년 십월(단기 사천삼백일년) 소초자(小肖子) 평규(平奎)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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